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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경제] 적폐라는 단어에 묻힌 것

2017.11.17

[시론] 적폐라는 단어에 묻힌 것


우리에겐 생소하던 ‘적폐(積弊)’라는 단어가 처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건 현재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전임 대통령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대미문의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직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오랜 기간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적폐를 개혁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박 전 대통령은 잘못된 시스템을 고쳐 그와 같은 대형 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이 용어를 선택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적폐는 ‘전임 대통령 시절에 이루어진 거의 모든 것’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전에도 일부 정치인들이 적폐란 단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된 적은 없다. 구글에서 적폐란 단어를 쳐 보면 1000만건 이상의 문서가 검색된다. 언론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언급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조차도 아무 거리낌 없이 농담처럼 이 단어를 내뱉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켜켜이 쌓여 있는 폐해가 심각하다고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고, 그와 같은 폐해가 조속히 청산되고 바로잡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폐라는 단어는 섬뜩하다는 느낌을 전해주기도 한다. 특히 이 단어가 뿜어내는 저항할 수 없는 힘과 대면할 때 그러하다. 현 상황에서 일단 적폐로 규정된 이상, 그 대상이 사람이건 시스템이건 ‘적폐가 아님을 증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이 단어가 너무 모호하고 너무 폭넓으며 너무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너무 피아를 확실하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의미와 쓰임새는 전혀 다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종북 혹은 빨갱이라는 낙인과도 닮았다. 그렇게 한번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사람이 그 주홍글씨를 벗겨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제 우리는 안다.

 7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권이기에 과거 문제의 청산 작업에 자신감을 갖고 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차피 털고 가야 할 잘못된 관행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매일같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지난 정부의 행태를 보며 국민들이 깊은 실망과 분노를 느낀 것도 사실이다. 바로 그 때문에 과거 정부에서 일어난 일들이 일단 적폐로 규정되고 나면 사실상 외길 수순을 밟게 되는데, 개중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사안이 섞여 있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해도 적폐라는 단어와 함께 그렇게 묻힌다.

 

 그렇게 묻힌 것들 중 하나가 검찰이다. 일부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서울중앙지검 검사의 거의 40%에 달하는 인원이 적폐 수사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의 수사 인력만으로는 부족해 전국 각지에 근무하는 검사들 수십 명도 파견되었다. 각 부처에서는 경쟁적으로 지난 정부 시절에 일어난 일들 중 적폐에 해당하는 사안들을 찾아 검찰에 고발하거나 수사의뢰하고 있다. 이 수사와 재판이 언제 마무리될지는 지금으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다른 대형 사건의 수사는 좀처럼 엄두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며 민생 사건이나 일반인들의 고소, 고발 사건도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과거 ‘범죄와의 전쟁’이나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처럼 전 검찰력이 동원되었던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과거 정부 시절의 잘못을 수사하기 위해 검찰이 이렇게까지 총력을 기울였던 적이 있었나 싶다. 이런 문제 제기조차 그럼 적폐를 그냥 내버려두자는 말이냐는 한마디에 묻혀 버린다.

 

 현 정부가 대표적인 공약으로 내세웠던 검찰 개혁도 동력을 잃었다. 저렇게 중차대한 적폐 청산 작업을 앞장서 실행하는 조직의 힘을 뺄 명분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검찰이, 일말의 반성도 없이 정권이 바뀌기가 무섭게 지난 정부의 잘못을 가차 없이 단죄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을 낯설어하며 지적하는 이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은 적폐 청산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검찰이 잘하고 있으니 힘을 실어주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검찰이 다시금 시대의 적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적폐는 지난 정부에만 있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성숙되고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과거에는 관행처럼 여겨지던 일들이 지금은 용납될 수 없는 범죄로 판단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고 시스템을 정비하는 작업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만큼 지금 정부의 행태 역시 다음 정부에서는 적폐로 비난받을 수 있음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