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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법원행정처 사태의 본질과 개혁 과제

2018.06.20

법원행정처 사태의 본질과 개혁 과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둘러싸고 혼돈에 빠져 있는 법원이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공식 입장 발표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법치주의의 최후 보루로서 하늘이 무너져도 엄정공평, 불편부당의 자세로 헌법과 법률에 따라 재판권을 행사해야 할 사법부가 재판거래, 판사사찰이라는 의혹에 휩싸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법원의 신뢰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은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법관인사권과 과도하게 권력기관화된 법원행정처 때문이다. 각급 법원의 판사회의와 전국 법관 대표회의에서 검찰 수사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였으나 정작 중요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 대법원 사법발전위원회도 아직 심각한 문제의식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근본적 해법이 없으면 사태가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

사법권의 독립과 공정한 재판 보장을 위한 법관인사제도는 이미 외국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헌법기구인 최고사법평의회에 법관인사권을 부여하고 법관은 본인 의사에 반해 승진하거나 전보되지 않는다는 ‘법관 부동성(不動性)의 원칙’이 그것이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에서 법원과 검찰의 심각한 정치도구화를 경험하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1946년 헌법 개정을 통해 최고사법평의회를 신설했다. 법관 부동성의 원칙도 헌법에 규정했다.

프랑스 최고사법평의회는 위원장을 포함해 15명으로 구성되는데 임기는 4년이다. 대법원과 각급 법원에서 선출된 대법관, 고등법원장, 지방법원장, 부장판사 및 판사 대표가 위원으로 참여한다. 8명인 외부위원이 법관 출신 위원보다 다수라는 점이 중요하다. 법관의 인사와 징계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며 법무부 인사안에 대해 동의 또는 부동의 의견을 제시하는데 그 의견은 구속적 효력을 갖는다. 이를 위해 최고사법평의회는 인사기록을 포함한 모든 자료를 참고할 수 있고 법관 인사에 관한 사항이 연례보고서로 공개되기 때문에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가 가능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은 헌법 제108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헌법 제108조는 ‘대법원은 법률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소송에 관한 절차, 법원의 내부규율과 사무처리에 관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다’고만 했을 뿐 법원행정처의 설치나 사법행정의 구체적 범위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문제는 재판기능이 본질인 사법부가 법원행정처를 통해 사법행정이라는 이름으로 행정부 소관인 국가정책에 과도하게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원행정처가 관장하고 있는 등기, 공탁, 가족관계 등록사무는 우리의 모델이 된 일본의 경우에도 법무성과 산하조직인 지방법무국이 담당하는 법무행정사무다. 민사정책이나 형사정책도 법무부의 소관 사무인데 사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법원행정처가 깊이 관여하고 있고 사법정책연구원까지 설치되어 있다.

법원행정처는 법원의 이해관계가 걸린 중요한 사법정책의 경우 법무부와 검찰이 반대하더라도 판사 출신 국회의원을 통해 의원입법의 방식으로 관철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논란이 된 상고법원도 의원입법으로 추진됐다. 이 과정에서 법안 통과를 위해 국회의원과 보좌관에게 치열한 로비를 하는 것도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중요한 역할이다.

법관 부동성의 원칙이 인정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대법원장이 법관 인사권을 갖고 있는 한 법관의 독립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법원행정처가 비대화되고 권력기관화되면서 법원행정처는 엘리트 판사가 거쳐야 할 필수코스가 되었고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으로 상징되는 법관 관료화의 원인도 이러한 인사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법관 인사권과 사법행정 전반에 관해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법관의 독립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제한하고 최고사법평의회와 같은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사법정책과 사법행정사무를 법무부로 이관하는 방안도 본격적으로 검토될 때가 되었다. 법무부의 탈검찰화로 적절한 여건이 조성된 만큼 일본처럼 판사가 법무부에 파견근무하면서 사법정책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청빈한 삶 속에서 진정한 법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김홍섭 전 서울고등법원장과 같이 법관 개개인은 헌법과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재판권 행사를 위해 헌신해야 하고 대법원도 사법행정이라는 이름으로 해왔던 거대 사법권력과 결별하는 것만이 국민신뢰를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