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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경제]블랙리스트와 헌법상 표현의 자유

2017.02.04

블랙리스트와 헌법상 표현의 자유_이승한 변호사



블랙리스트는 경계를 요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뜻하는데, 과거에는 주로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사용된 용어였다. 1920년대, 노동운동 경력이 있어 취업시킬 경우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노조 활동을 과격하게 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여러 회사들이 공유하였는데, 이를 블랙리스트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 용어가 훨씬 다방면에 쓰이고 있으며, 정보통신(IT) 업계나 휴대전화 단말기 등록과 관련해서 블랙리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 대척점에서 자신들의 편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뜻하는 화이트리스트라는 단어도 자연스럽게 함께 언급된다.


지난 몇 주간 우리 사회를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은 단어는 블랙리스트였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거나 작성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난공불락과도 같았던 前 대통령 비서실장과 現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그에 앞서 前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前 차관, 前 청와대 정무수석도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아마도 특검의 칼끝은 現 대통령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블랙리스트가 무엇이기에 저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줄줄이 수의를 입게 된 것일까. 지금까지 밝혀진 바대로라면,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심이 되어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야당 후보자를 지원한 문화예술인 명단을 만든 후 명단에 오른 이들에게 재정적 지원 등과 관련한 불이익을 준 사안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인사들은 시인, 음악가, 미술가, 영화감독, 배우, 사진작가 등 문화예술 각계각층에서 1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어느 정권이나 자신들과 가치관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지 않은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이른바 ‘코드’ 논란을 일으켰던 참여정부 시절, 보수단체 쪽에서는 진보 성향의 사람들이 인사나 각종 지원 등에 있어 부당한 혜택을 받는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자 상황은 역전되었고, 참여정부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그 위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정국을 뒤흔들 정도의 파괴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토록 온 국민이 분노하는 것일까. 아마도 숨은 이유는 現 대통령에 대한 불신과 그에 맹목적으로 동조했던 일부 관료들에 대한 실망이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라를 이처럼 혼란에 빠뜨린 데 대해 일정 부분 이상의 책임이 있는 고위 관료들이 “나는 몰랐다”고 부인하며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절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특검이 블랙리스트라는 그물을 이용해 고위 관료들을 건져 올리는 모습을 보며 아마도 국민들은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사태의 본질은 우리 헌법의 핵심적 가치이자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침해한 데 있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헌법은 제19조에서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또  제21조 제1항에서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여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제22조 제1항에서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유권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로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태롭게 하는 등의 이유로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법률로서만 제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관료들이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기준에 따라 이러한 기본적 자유권을 행사한 문화 예술인들을 분류하고 차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사자들은 선택을 강요당하거나 혹은 침묵하게 된다.


관점에 따라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 수도 있다. 사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문화예술계 인사나 단체들에 대한 지원 혹은 불이익 제공 여부는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촛불 및 탄핵 사태와 맞물리지 않았더라면 국회나 일부 언론에서 몇 차례 문제 제기를 한 후 그대로 묻혀버릴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확실히 매듭짓고 나가지 못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사한 일이 반복될 수 있고, 그렇게 양쪽에서 번갈아 찍어놓은 낙인은 결국 나라와 국민들을 두 동강 낼 만한 위험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를 단지 ‘얄미운 고위 관료의 처벌’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헌법의 가치와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소중한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